나의 일기

노동야학과 노동상담소 개설.

리라568 2023. 4. 21.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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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나의 즐거움, 야학생활

 

맨 먼저 야간 학교를 시작한곳은 풍한 방직이 있던 유천동지 역이었는데 교회를 밤에 빌려 쓰는 조건이었다.

선생님을 모으 고, 수업시간표 대로 배치하고, 훈련시키고, 직접 교재를 만들고,

어떻게 자의식을 키우고 민주적인 방식을 배우며 자신의 사회적 환경을 극복 할 수 있는 인격을 형성해 갈 것인가?

3교대와 맞 교대의 장시간 노동으로 지친 그들을 즐겁게 올수 있게 할 것인 가를 주요과제로 삼았다.

오랫동안의 준비 과정을 거쳐 선생과 학 생이라는 벽을 넘어서 선생은 배우며 가르치는 강학이라 하고, 학생은 가르치며 배우는 학강이란 개념을 세운 민주 야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는 중국 모택동의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같은 가치에 두고, 서로 배우고 교류해야 균형감 있는 발전을 가져온다는 사상과 파울로 프레이리의 <학교는 죽었다>의 기본사상인 제도를 유지 하는 교육 보다 제도를 반대로 변혁해 가는 제도권 밖의 교육의 필요성에 기초하였다. 물론 모택동이 저지른 살육과 개혁의 방식을 동조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가 정신노동자의 특권의식을 지덕체의 합일이라는 이상적인 프레임으로 바꾸려 한 점을 받아들였다.

 

나는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논쟁을 좋아하지 않았다.

생각의 차이를 생각 안에서 좁힐 수 있다는 것은 그 생각이 또 변할 것이라는 가설을 전제로 한다.

생각은 기초이며 행동은 구체적이고 명확한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전체적인 경향이나 느낌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행동으로 실천해나가길 바랬다.

수많은 논쟁과 생각으로 가득 찬 무거운 지식인 보다는 실천하는 한 인간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래서 조직의 중심 에서 오만하게 야학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음을 알았지만 위험부담을 떠 앉고 야학을 시작했다.

야학을 교회와 함께 하려했던 의도는 탄압이 두려워서 였기에 우리 교사들은 일요일 예배에 참석하여 신뢰를 쌓는 노력과

서울 기독교교회연합회와 연대하기 위해 서울에 종종 가야만 했다.

 

한번은 한신대학교에서 모임을 갖고 나오는데 전경들이 교문을 막고 학생들은 돌을 던지고 있어 피하며 나오려다 

데모행렬에 휩쓸리고 말았다.

아 큰일이다. 하는 순간 전경들은 최류탄을 무지막지하게 퍼부으며 나를 향해 돌진해왔다.

'윽 이런....  어쩌지? 여기서 잡히면 서울에 온 것은 비밀리에 진행된 것이고 내 전과로 인해 구속될 것이며 곧 열게 될 야학은 위기를 .... ' 하는 순간 난 무조건 달려야 했다.  

그러나 내 앞에는 한신대의 아주 높은 담장이 떡하니 눈에 들어오고 전경의 뜀박질 소리가 요란하니 

'음 포기해야..... 절망이네' 

하는 순간 높은 담장에서 누군가의 손길.....   '후 살았구나.'

 

지난한 시련을 극복하고 드디어 노동야학을 열고 학생들과 교회에서 수업을 시작하니. 야학을 하면서 난 물 만난 고기처럼 즐거웠다.  대화동공단 야학과 서부야학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대화동공단 야학은 노동자가 아닌 동네 양아치와 깡패 그리고 빈민들이 몰려왔다.  

 

거짓말, 폭력, 강간에 도둑질을 쉽게 생각하던 그들은 나의 인내 력의 한계를 실험하였지만 점점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러기 위해서 나는 그들의 삶을 배우고 귀 기울였으며 또한 그들을 배우지 않고는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었다.

매일 그들과 어울려 놀고 상담해주고 패싸움하는 곳에 가야했고, 소주 잔을 기울이며 밤을 새웠다. 

대학생 선생들을 울리고 수업을 장난하는 곳으로 놀러 오는 그들이었지만  나에겐 그들이 친구였고 인생의 선생이었으며 미래의 희망이었다.

 

2기 야학은 열두 살 소녀부터 50대 순박한 아저씨 노동자들 이었는데 그들은 지식인에 비해 맑고 검소하고 책 임감도 강했다. 내가 아는 얄팍한 지식이 그들의 자존에 힘을 주니 마음을 열고 기다리는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삶의 근원이 되었다. 가난한 호주머니로 학생들과 라면이라도 먹으려면 돈을 벌기 위해 과외지도를 해야 했다.

 

특히 추운 겨울날 먼 길을 달려가 꾸벅꾸벅 졸면서 수학을 설명하다 화들짝 깨서 미안, 이런 졸았네.” 하곤 늦게 라도 야학을 찾아가 돌아오는 버스를 놓치게 되면 결국 다른 선생들과 저녁도 굶고 걸어서 집에 오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더 많은 희생과 피로감을 안고 야학에 왔고 우린 서로를 바라보며 격려 하였다.

 야학을 몇 년 째 계속 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어 려운 일이었지만 진심은 반드시 통하는 것이었다.

 

그때 대학을 5년 만에 졸업하니 보안대 계장은 취직 자리로 00여고 역사 선생님 자리를 주선했다.

아버지에겐 마음 에 드는 제안이었지만 나는 따를 수 없었다.

 

‘자연과 인간사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힘은 삶과 죽음을 관장 하니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죄의식을 불러온 다.’ 신부님의 글 중에서.

 

 

위의글은 그야말로 얼기설기입니다. 이 책이 그나마 정리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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