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교도소는 살 만 하다.
그 당시에는 국가 보안법에 저촉되면 면회가 금지 되고, 다른 사람과도 섞이지 못하게 되 어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유치장 주변을 서성이다 돌아가곤 하셨는데 교도소에서도 여전히 왔다가 그냥 돌아가시곤 하였다.
대전의 목동교도소는 일제시대에 세워진 유서 깊은 곳이었 다.
“옷 다 벗어, 갈아입어”여자 교도관의 말투는 사뭇 권위적이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나의 방은 복도를 따라 양 옆 방을 모두 지나 화장실 목욕탕을 또 지나 방이 세 개만 있는 독채의 독방이었다.
유리창은 깨져 있고 전기불도 없고 매트리스는 더럽고 방구석에 양동이 물은 바닥까지 꽝꽝 얼어 있었다.
그때, 옆 감방의 어둠 속에서 “여보, 오셨어요? 식사는…….” 하며 끝없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 있구나. 누구랑 같이 있나?’ 모든 것이 낯설고 춥고, 여기서 살 수 있 을까 싶었다.
창 밖에는 나무 몇 그루와 담이 둘러쳐 있고 하늘엔 별들이 있었다.
다음날, 밥을 나르는 여자가 “어쩌다 들어왔어... 이방에선 못살아. 작년에 네 명이 이 방에 서 겨울나고 동상 걸려서 얼마나 고생하게.” 알고 보니 내가 있는 감방은 환자를 두는 ‘병사’ 인데 겨울에는 햇빛이 비껴가는 잔인한 방이라 손발에 동상이 걸리는 최악의 환경이었다.
집에서 보내 준 ‘임어당 전집’을 읽으며 넓은 방을 산책하다보니 옆방의 아줌마가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며 끌려 나오고 있었다.
그날은 목욕하는 날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미찌꼬 인데 바람피우는 남편을 죽이고 죄책감으로 미쳐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겹겹이 껴입은 옷을 벗다 보니 목욕시간 20분이 끝나가고 있었다.
‘젠장 물은 식고 옷 벗다 나가게 생겼네.’
그때 누군가 등을 쓱쓱 밀어준다. “아이고, 어린 학생이 웬일이랴?” 물을 좍 좍 끼얹으며 교도관 눈치를 보았다.
국가보안법 위반한 나는 누구와도 말을 하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내 방 창 밖에는 반갑게도 나무가 몇 그루 있었다. ‘나무 이름에 무기수라는 게 있었나?’ 알고 보니 무기수들이 형을 확정 받으면 심는 나무라는 뜻이었다.
‘저 나무는 주인이 죽어도 자라나겠지? 자유를 갈망했던 주인을 기억하며 높이높이. 아 그립구나. 친구들, 후배들 , 부모님, 그리고 자유가....... ’
‘똑똑’
창문 너머 교도관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학생이구나? 힘들지? 책 필요한 것 있으면 빌려 줄까? 난 너희들을 이해해.”
“아, 네.”
“내가 학생이라면 나도 그랬을 거야.”
그녀는 힘없이 말했다.
아빠는 딸이 얼어죽을까 한 걱정이 되어 침낭과 물품을 보내오셨다.
면회도 못할 줄 알면서 매일 교도소 마당을 서성이다 가실 그분의 늙은 어깨가 떠올랐다.
'아빠 죄송해요. 사랑합니다.'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소리내어 말 할 수 없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분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나를 지켜주었으나. 이제는 둥치 만 남아 만져볼 수가 없었다.
그저 엉덩이를 깔고 앉아 고마워 할 수 밖에 없었다.
70이 넘으신 나의 아빠에게 할 짓이 아닌데.
다음날부터, 물을 갈아먹은 탓인지 아니면 양동이 물바닥이 더러운 것을 본 순간 마음이 동했는지 설사병이 나고 하루 이틀 약도 없이 보내는데 아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아이 를 출산 한 모양이었다.
‘신기하다. 아가를 다 낳고 키우다니.’
화장실에서 돌아와 보니 얼어 붙은 흰쌀 밥 한 덩어리를 낯모르는 사람이 식구 통으로 던져 넣고 간 모양이었다.
그 옆에는 다먹은 우유 팩도 던져져 있었다.
누가 이런 쓰레기를 버렸을까? 하며 자세히 보니 무언가 긇어서 만든 글씨가 보였다.
.
‘나는 7방에 사는 경희대 00학번인데. 집시법으로 2년 형을 선고 받았어.
너의 사건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구나. 힘내라. 쌀밥은 출산한 엄마를 위해 나온 건데 먹어.’
멸균우유팩을 뒤집으면 은박지가 나오는데 거기에 날카로운 것으로 쓴 편지였다.
그때 공범이라 멀리 독방에 따로 갇혀 있던 진숙이가 화장실을 핑계로 용기를 내어 몰래 나에게 뛰어왔다.
“희영아 우리 곧 나갈 거야, 어제 할머니 할아버지가 와서 말해 주었어.”
내 기억에 그녀 의 조부모님은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우린 면회도 안 되는데 환청에 시달려 제정신이 아니 었다.
우린 교도관의 만류에도 검찰로 조사 받으러 가는 날, 호송줄에 묶여서 수척한 얼굴위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야 했다.
한달이 지나서야 '반성문 써. 내보내 줄게.' 하는 명령이 떨어졌다.
‘어째야 한단 말인가? 정작 무얼 반성해야 한 단 말인가, 국민을 학살은 그가 반성해야지. 고문조작으로 나의 친구들이 망가져 가게한 것을 내가 반성해야 한다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것이지? .’
지하 취조실에서 어떤 선배가 미쳐서 헛소리를 하던 장면과 아버지의 힘없는 어깨가 떠올라
검사가 요구하는 반성문을 쓰고 한 달 만에 출소하였다.
정작 나는 자유에 대한 그리움과 열망을 교도소에서 확인하게 된 셈이다.
그 어느 곳에도 없던 자유에 대한 허기짐이 일상에서 넘쳐나는 무게감으로 빛을 잃어 갈 때 나는 교도소 담벼락에 자라고 있는 무기수 나무를 떠올린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중에서 ‘그대들 바람 따라 여행하는 자들이여, 어떤 풍향계가 그대들의 길을 인도해 줄 것인가?
그대들 만일 인간이 만든 감옥의 문이 아니라 자기의 멍에를 부수는 것이라면 어떤 인간의 법이 그대들을 묶을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이 만든 쇠사슬에 결코 비틀거리지 않고 그대들 춤춘다면, 어떤 법이 그대들을 두렵게 할 것인가? ‘
2. 보이지 않는 사랑의 힘
자유의 바람을 맞으며 사회로 걸어 들어오는 기분이라니……. 너무나 생생하여 나의 가슴을 뛰게 하였다.
푸른 하늘을 끝 간 데 없이 볼 수 있다는 기쁨과 그리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즐거움으로 발걸음이 가벼웠다.
나에게 화를 내고 머리채라도 잡으리라 생각했던 나의 양모는 놀랍게도 변해 있었다. 100일 동안 기침을 하면서도 나를 위해 밤낮으로 염불을 하고 백방으로 뛰다 보니 수감자 가족들의 모임까지 참여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거의 매일 검사에게 편지를 쓰고 ……. 만나지도 못할 줄 알면서 담 너머에 있는 딸의 소식이라도 들을까 교도소 앞을 서성이다 책과 먹을 것이 라도 넣어 주고 돌아와야 새우잠이라도 잘 수 있었다고 하였다.
결국, 부모님들의 간청에 담당검사의 마음이 움직여 유래 없이 서울 지휘본부까지 설득 하여 기소유예로 풀려 난 것이었다.
먼저 조사 받고 나온 대학의 동기생들은 주눅이 들어 나와 만나는 것도 피하고 머뭇거렸다.
그것은 나의 정의감에 불을 질렀다.
내가 집으로 돌아온 날 남자 친구가 찾아왔다. 그는 나보다 더 마르고 근심으로 까맣게 탄 얼굴로 나의 손을 잡았다.
나의 부재 동안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그의 눈빛을 보니 알 것 같았다.
나는 “이번 가을을 잃어버렸네.” 하며 씩 웃었더니
다음날 “너의 가을을 바구니에 담았다.”며 바구니 가득 과일을 모아 내게 선물하였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 폭 풍과 벼락 속에도 다시 힘겹게 돛을 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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