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기

교도소 밖도 교도소.

리라568 2023. 4. 19.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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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교도소 밖도 교도소.

 

 

** 숨통을 조여도 꺾일 수 없어 **

 

출소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한 발작 한 발작 사회로 걸어 들어온 나 의 발목엔 새로운 족쇄가 서서히 채워지는 답답함이 시작되고 있었다.

 

대학에 복학을 하니 난 알게 모르게 유명인사가 되어있었다.

담당교수에 담당 형사에 안기부 직원에 보안대 계장에 .........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것이 예사였는데 그렇다고 내가 하 던 일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것을 운명 혹은 기질, 혹은 자의식이라 부르던 나의 삶은 계속 흘러가야 했고 누군가의 반대로 그만 두는 것은 가장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누가 자유를, 민주 를 본연의 가치로 그리워하고 환영하지 않겠는가!

E.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 에 나온 유명한 문구처럼 ‘역사란 자유의 확대 과정’이며 덧붙혀 개인의 삶도 나는 자유의 확대 과정이라 고 믿고 있었다.

 

세수할 때는 물고문의 고통이 떠올라 씻다가 뛰쳐나와야 했다.

눈에 띄는 활동을 하지 않아도 점점 사생활이 조여들기 시작 했다.

전화기는 지지직거리며 나 도청되고 있어요라고 소리 치고, 수시로 보안대에서 급습하면 책이며 일기는 강탈되고 또 불려 가야했다.

 

나는 종종 예측할수 없는 삶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고문실 의자에 앉아 나의 일기에 그들이 쳐놓은 빨간 줄 부분을 진 땀을 흘리며 해명해야 했고, 마음은 감시를 피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으로 바쁘게 움직여 갔다. 내 친구들은 맥없이 불려가 곤욕 을 치르는 일도 생기니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계산 하고 늘 미행을 따돌리며 살다보니 습관이 생겼다.

'버스는 마지막에 탈 것, 아파트 경비원이 나를 보지 않을 때 출입할 것, 스터디 모임을 할 때는 극도로 미행을 조심할 것, 전화로는 시간과 장소등을 말하지 말고 암호를 사용할 것, 메모는 모두 이니셜로 하고 바로 찢어버릴 것, 등등'

다시 끌려가 고문 속에서 종종 조직을 지켜야 하는 고통스런 꿈을 꾸기도 했다.

조직(?) 이래야 별것이 없었다. 

역사와 경제를 공부해 바른 시각을 갖고자 하는 공부 모임과 시국을 집어가며 시위를 꾸리는 친구들을 돕는 것 뿐.

 

보안대 담담 계장은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여 나의 안부를 묻곤 하였다.

한번은 돈 봉투를 슬쩍 집어주며 오빠라고 불러, 취직도 시켜 줄게. 요즘 오00 근황은 어떠냐.” 하곤 하였다.

 

최 고급 식당에 최고급 차에 국민의 세금을 물 쓰듯이 쓰는 그들에게

'이건 아닙니다' 하며 돈은 돌려주고 가능한 연락을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원 하는 정보를 내주지 않았지만 나는 솔직히 그를 미워 할 수 없었다.

 

이런 태도는 운동권 내부에서는 자유주의적태도라고 비난 받을 수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세월이 흘러 실 미도사건을 다룬 영화를 보며 나를 고문하던 사람들을 떠올렸었 다.

TV 뉴스에서 고문 대장으로 유명했던 이근안 경감이 몇 년 도피 끝에 구속되는 모습도 보았다. 늙고 추한 그 얼굴에 비친 고통의 세월을 나는 비난만 할 수 없었다.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서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것으로 보였다.

그 당시 운동권은 이념논쟁과 보이지 않는 조직재편이 이루어지면서 한편 파벌이 생기고 있었다.

인간의 약점이나 연애담 까지 백안시 하여 도덕성 비판을 일삼으니 존경을 받기 위해서 는 적당히 숨기고 눈치껏 행동하는 분위기가 만연하였다.

 

누가 누구를 어떤 기준으로 죄를 묻고 추방시키고 활동을 금지시키고 조직의 중심을 장악하는지 난 알 수 없었다.

신념과 믿음을 강조 하였지만 서로 믿지 않는 지경으로 부서져 내린 관계를 뒤로 하고 난 나만의 영역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노동자 교육은 그 당시 대전에서는 미개척 분야라 아무 준비도 없었지만 맨손으로 교회와 후배들을 설득해서 노동야학을 열었다. 지난한 과정이었다.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며 아무도 돕지 않는 험난한 길이었다.

 

 

 

2. ** 양모의 죽음**

 

미움은 사랑의 반대말 일지 모르나 그 힘의 근원은 하나이라 생각한다. 인연과 관심이라는 마음의 연결이 우리에겐

소박하지만 삶을 이어주는 에너지이며 인간임을 깨닫게 해주곤 한다. 

 

나의 양모는 딸로 태어난 나를 어릴 때는 몹시 섭섭해했지만 그것은 자신이 아이도 못 낳고 남을 괴롭히는 성격인 바로 그 만족하지 못하는 자신을 미워한 것이었다.

마음은 본래 하나인데 좋고 싫음, 욕망과 좌절, 행복과 불행으로 나뉘면서 본래의 자리를 잃고 살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 게 미움과 좌절과 불행감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을 배출하는 대상으로 꼭 필요한 존재였다는 것을 나이를 먹고 알게 되었다

나도 자식을 길러 보니 열 손가락 깨 물어 좀 덜 아픈 손가락도 있으니 때에 따라 더 어렵거나 힘든 녀석이 있기 마련이었다.

교도소에서 나와 그녀가 나를 위해 기도를 정성껏 했을 뿐 아니라 구명 운동에 앞장선것을 알고 감사했다.

그녀는 자신의 허물을 알고 단 한마디로 비난하지 않았다. 사실 모든 가족이 그러했다.

그녀는 몇 년 후인 1881년에 용인의 용화사로 홀연히 떠나 다음 생에는 이런 고통을 더 받지 않으리라다짐하고 마음 공 부에 전념하였다.

1982년 가을바람이 나락 모가지에 머물 쯤에 속세가 그리웠는지 살던 아파트에 놀러 왔다.

그녀를 우연히 집 앞에서 딱 마주쳤는데 순간 그녀의 손을 나도 모르게 살짝 잡고 있었다.

그토록 나를 미워하고, 나 역시 이 사람을 미워하고 두려워했었 는데......

 

'이제  많이 늙었네요. 그동안 고생이 많았어요. ' 엄마!’ 진심으로 엄마라고 불러 본 처음이자 마지막일줄은 

전혀 몰랐다. '그래 다시 돌아올 생각이야. 겨울이 오기전에. 놀러 갔다올게.' 하며 총총히

사라지는 그녀...   

소리내어 말로 하지는 안했으나 한순간에 그녀의 모든 것이 용서가 되고 감사한 마음이 찾아왔다.

그녀의 손을 내가 잡은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며칠 후 그녀는 절로 돌아갔고 그날 밤, 심장마비로 조용히 세상을 등졌다.

 

 용인의 용화사 장례식 앞마당에는 만장이 바람에 휘날리고 스님들이 그녀를 정성껏 보내주었다.

 500년 묵은 은행나무의 바람에 우수수 떨어졌다

노란 낙엽 융단을 즈려밟고 스님들의 독경소리 속으로 자식을 못난 한을 뒤로 하고 떠났다.

 그녀의 유언대로 화장해 뿌리지 않고 정갈한 산소를 만들어 고이 모셨다.

 

그녀에 대한 용서는 미움이나 그리움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그때를 바라 볼 수 있게 하는 신비의 묘약이 되었다.

 

그녀와 그녀를 미워 하던 나 자신을 용서 한 나에게 난 감사 하였다. 삶의 여행이 아름다운 것은 용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리석고 바보 같아 길을 잘 못 든 것만 같을 때 그런 삶을 만든 나를 용서하 는 것이야말로 여행자가 지닌 참된 용기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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