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간염으로 쓰러지다. **
양모는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오래전에 퇴직을 하여 가정형편이 넉넉지는 않았다.
생모는 젊은 날에 무리를 하여 디스크 수술을 두번이나 하고 나니 몸이 비뚤어져 외출도 못하고 있었다.
그당시 기술이 허접한 것을 모르고 우린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그녀의 몸은 뒤틀리고 통증으로 고통받아야 했다.
너무나 순수하고 착한 분이 약으로 살아야 하니 나에게 늘 슬픔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나름 최선을 다해 소박하게 가정을 돌보니 남들이 보기에도 제대로 된(?) 가정이 된 듯 하였다.
어려서부터 엄마를 식모라 생각하라는 양모의 주장 대로 ‘에미야’라고 부르다 ‘엄 마’로 바꾸려니 입이 안 떨어지는 시절이었다.
야학이 잘 시작되어 바쁘게 지내던 어느 날, 계룡산 에서 M.T(membership training)를 하고 돌아온 나를 아버지가 놀라서 부르셨다.
“생리 하니?” 생뚱맞은 질문에
“아니요.”
“헌데 너 이상하다, 소변 색깔이.” 너무 급하게 나오다 변기의 물을 내리지 않아 붉은 색의 소변을 발견하신 것이었다.
병원에 가보니 ‘급성B형 간염’이므로 입원을 하라고 권했다.
집에서 한 달간 링겔을 맞고 휴식을 취하기 시작하자 친구, 후배, 노동자의 방문이 끊이질 않았다.
“너 국회의원 나가도 되겠다. 도대체 무얼 하고 다니기에 매일 사람이 바뀌어가며 찾아 오는지, 쩝.” 사실 전염성이 있는 병인지라 부모의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손님들이 오고 갈 때마다 내 방의 모든 것을 소독하고 따로 대접하여야 했으니
그래도 나의 부모님은 불평하지 않고 집에 데려온 배고픈 학생과 후배들을 먹여야 직 성이 풀리는 나를 말없이 인정해 주었다.
평소엔 말이 없는 아버지는 잠든 나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볼에 뽀뽀를 잊지 않았다.
2.교도소로 다시 가다.
병에서 자리를 털 무렵 1987년 6.10민주화 투쟁을 앞두고 있었다. 전두환 정권이 군부 독재를 지속시키려는 4.13호헌 조 치에 대한 범야권이 연합하여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였다.
역사의 현장이 되리란 기대로 병석을 털고 나가보니 10만 군중이 한 목소리로 민주화를 외치는 모습을 만났다. 생명과 인생을 민주화 에 바친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결실을 맺을 것이란 기쁨이 찾아 왔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지 싶어 주위를 살피는데 뒤에서 ‘우’ 하며 사람들이 밀려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니, 넘어지겠는 데....... 밀지 마요.” 하는 순간 후배가 군중에 밀려 넘어지는 것이 보였다.
확 손을 잡아채 일으키려는데 뒤에서 느닷없이 누군가 내 허리를 잡고 번쩍 올리더니 전경 차에 던져 넣어 버렸다.
‘헉, 이런’ 힘없이 당하니 황당했지만
‘곧 나가겠지. 아무것도 하 지 않았으니.’ 란 생각에 걱정을 억눌렀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날수록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눈치를 보니 문제의 전과 기록 때문에 점점 앞줄에 선 주동자로 분류되어 가고 있었다.
결국 충무체육관에 잡혀 온 500여명의 군중 중에 나 만 남겨져 서부경찰서로 이송되어 다시 유치장에 갖히고 말았다.
"야 너 또 왔냐?"
"구경하고 있다 왔는데....."
다음날 그들은 나를 구속시킬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자술서를 쓰기 시작했다.
“이 여자 보았지? 무엇을 하고 있었나? 네가 잡았나?”
“네, 머리 에 띠를 두르고 손에는 각목을 들고 구호를 선창하고 있었습니 다.”
새로운 시나리오가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아저씨, 사정은 알겠지만 양심에 떳떳해야지요! 사거리에서 시위대열을 구경하고 있었잖아요. 한 사람의 인생이 걸렸는데 거짓말 하면 안 되죠.” 라고 하였지만 난 여지없이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그 순간 나의 아버지 얼굴이 떠오르고 ‘이번에 또 들어가면 얼마 나 놀라고 슬퍼하실까’ 생각하니 그동안의 긴장이 한바탕 무너지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더 이상 투옥되지 않기 위해 매사를 철저히 관리하고, 미행을 따돌리고, 법에 저촉이 안 되도록 조심조심하며 침이 마르게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든 탑은 이렇게 엉뚱한 곳에서 한순간에 사라지기도 하는 게 인생이었다.
나의 배는 다시 원치 않는 섬에 유배된 꼴이 되었다. 6년 전의 목동 교도소는 기념관이 되어, 진잠에 새로 크게 지은 현대식 대전교도소가 웅장하게 나를 맞이하였다.
“어! 너, 전에 들어 왔었지?” 그렇게 시작된 두 번째 옥살이는 몸도 마음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삭막한 콘크리트 건물의 육중한 철문 을 수도 없이 통과해야 했고 수세식 변기까지 갖춘 작은 독방은 오히려 나를 숨막히게 하였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라며 스스로를 설득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원해서 온 것이라지만 정말 원치 않는 상황에 닥치니 좌절감을 배우게 되었다.
이 일은 이제 그만 내 인생의 항로를 바꾸어야 할 때가 온 것을 의미 했다.
시절이 바뀌어 면회 온 국회의원의 입김으로 감방에서 링겔 을 맞으려니 처량하고 화가 나 주사바늘을 뽑아 버렸다.
“옆방 아줌마 매일 아프다고 약 달라는데 그 사람 해줘요.“
”그건 안돼. 4235번 면회다. 나와.“ 집시법이라 면회가 되던 그 때 차라리 면회가 안 되던 과거가 그리웠다.
일흔이 넘은 아버지는 웅웅 울리는 면회실이 힘들고 낯설어 자꾸 구멍이 뚫린 위쪽으로 희끗 희끗 벗겨진 머리를 올리며 외쳤다.
“책은 들어갔어? 담요는? 링 겔 맞았어? 희영아, 힘내라. 잘 될 것 같아. 000국회의원 만났지?
잘 될거라 하더라. 아이고 잊어버리고 못 물어보고 가면 잠이 안와.”
그리고도 혹시 잊 은 게 있나 주섬주섬 안경을 꺼내 써 온 쪽지를 또 읽어 보시며 쓸쓸한 발을 돌리시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아버지 손을 잡고 엉엉 울며 소리치고 싶었다. ‘아버지, 죄송해요’ 라고.
차디 찬 감방에 돌아와 흐르는 눈 물을 닦고 또 닦고....... 그의 사랑이 조건없이 그저 나를 지지하고 인정해주시는 사랑에
손끝 만큼도 보답은 커녕 슬픔을 드려야 하는 내가 아쉽고 아쉬웠다.
그는 단 한번도 ‘너 왜 그러니? 무엇이 불만이니? 나를 왜 힘들게 하니?’ 라고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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