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전의 삶의 여행
1. ** 정원의 초목 옆에서 버지나아 울프를 노래하다 **
나는 1961년도에 온순하고 멋있는 그러나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아버지와 인내심 많은 씨받이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50세가 넘기까지 부처님에게 온갖 치성을 드려 태어난 나는, 집안의 장남이어야 마땅했는데 불행하게도 딸이었다. 물론 첫째 아들도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을 주관하던 양어머니는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핏줄이 아닌 줄로 굳게 믿고 계셨고 쫓겨나지 않으려는 나의 생모는 죽은 듯이 거짓말을 하여야 했다.
그러니까 생모는 이미 다른 분의 아이를 임심한 상태에서 들어와 훗날 아이를 둘 더 낳은 것이 나와 남동생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사실 나에게는 이젠 꿈속의 동화 같이 아스라이 느껴지고 과거의 나를 넘어 설수록 의미가 퇴색 되어 갔다. 그러나 마음의 세계란 대부분 어린시절 보고배운 습성, 다시 말해 업(業)의 무의식적 영향 안에 있기 마련이었다.
내 삶의 여행을 찬찬히 돌아보면 신기하게도 내가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났다는 사실이 수학문제의 답이 정확히 단 하나이듯 필연적인 일임을 깨닫곤 한다. 윤회와 전생이론을 다룬 수많은 책들은 이점을 잘 지적하고 있으니 인간은 무의식에서도 스스로 주인으로 살고 있는 셈이다.
모든 생명 존재의 출생과 삶의 이야기 들은 나름대로 얼마나 신비로운 이유를 가졌는가!
대가 끊기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씨받이를 들인 양모 입장에선 내가 딸이면 안 되는 이유는 너무나 많았다.
생모를 일찍 쫒아내야 눈에 가시를 뽑는 격인데 아들을 볼 때 까지 또 기다려야 하고 여태껏 아들을 낳기 위해 온갖 공을 들인 것이 헛수고가 되었다는 자괴감과 남편의 관심이 딸에게 쏠릴지도 모른다는 것들로 온통 뒤엉켜 있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아빠의 사랑과 양모의 미움을 동시에 받으며 남성과 여성이라는 육신의 차이가 빗어내는 마음의 편향을 지독하게 맛보며 자라야 했다.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 시절 아버지는 공무원이었고 집은 선화동 도청 뒤의 일본식 집이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잘 가꾸어진 소나무와 정원수가 있는 길고 긴 복도와 이층을 가진 조금은 고풍스러우면서 왼지 우울하고 눅눅한 집이었다. 내 방 창 밖에는 장미와 포도나무, 모란과 라일락이 피었다 지고, 나는 그 그늘 아래서 책을 보고 글을 쓰며 혼자 놀곤 하였다. 성곽처럼 둘러쳐진 집 밖에 사사로이 나가는 일은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일하는 언니들, 가정교사, 게다가 부모가 셋이나 되는 대식구였지만 누구도 서로에게 진실 된 관심을 보이는 법을 알지 못해 나의 친구는 하늘과 바람과 비와 꽃이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시를 읽으며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를 노래하는 마음이 되어 나무와 병아리와 꽃들 곁에서 나의 가슴 따뜻한 시절. 그 시절은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과 행복감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애들 엄마가 따로 있다며?” “부엌때기로 일하는 저 언니가 엄마잖아. 애만 낳아주고 꼼짝 없이 식모로 붙어살아. 애들이 눈치 채면 난리나. 모른체 해.”일하는 언니들의 대화를 엿듣 기 전에도 난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역시 그랬구나. 불쌍한 저 여자에게 포악스런 그 여자는 역시 나의 엄마가 아니었어.’ 노예처럼 손발이 벗겨지고 지문이 사라질 정도로 일만 하는 생모의 존재에 마음이 아픈 세월이었다.
이것이 훗날 내가 여성운동에 관심을 갖고 여성단체를 만들게 된 심리적 배경이었다.
완악하고 모지락스러운 양모는 내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반항적인 것을 눈치 채고는 늘 아들과 차별을 두어 곤란에 빠뜨리거나 분노의 대상으로 미워하니 나는 우울하고 병약한 소녀가 되어갔다.
다만 내가 1등을 했을 때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지인들에게 내 존재를 자랑스럽게 떠벌이곤 하였다.
이 무석 저 <30년 만의 휴식> 중에서 ‘사람의 영혼은 다른 사람의 인정과 사랑을 먹고 산다. 어릴 때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과 인정을 받고 자란 사람은 성숙한 인간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부모란 없기에 많은 사람들이 인정과 사랑에 굶주린 채 어른이 된다.
우리들은 어릴 때 채워지지 못한 인정과 사랑을 받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모든 것을 바쳐 성공하고자 하는 것도 그 성공을 통해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기 때문이다.’
2. **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한 사람과 내가 사랑한 사람, 나의 부모 **
아버지는 음악을 즐기고 여행과 영화를 좋아하며 남을 돕는 따스한 손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양모 몰래 나의 손을 잡고 용돈을 슬며시 건네주며 나의 구두만은 반짝이게 닦아 아침 마다 가지런히 현관에 놓아두시는 수고를 즐거워하였다.
비가 오는 날, 버스 정류장에 왼 늑늙스구레한 사람이 우산을 한 손에 꼭 쥐고 기다리고 있다면 그분은 나의 아빠였다. 나이 50에 나를 낳았으니 …….
그분은 내가 키가 한 뼘씩 커 갈수록 주름이 하나씩 늘고 머리가 빠져 가고 있었다. 그는 평생에 걸쳐 내 고통의 한 자락을 들어 주었고 조금 멀리서 진심을 다해 지켜 주었다.
어느 생모의 생일날, 초등학생인 나로서는 용돈을 모아 호떡을 사서 기뻐할 엄마의 얼굴을 그리면서 그녀가 일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오길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었다. 생모는 자정이 넘도록 그릇을 닦고 또 닦고…….
다음날 딱딱하게 굳은 호떡을 몰래 먹던 그녀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삶의 무게와 양모의 포악함을 견디느라 감정도 의지도 사라져간 노예의 모습 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양모에게 헌신적이었고 놀랄 정도로 충직했다. 훗날 양모가 “에미야, 너 때문에 내가 잘 살았어. 네가 고생이 많았다.”고 마음을 열만큼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25년이 지나 “엄마 그때 생각나? 생일날 용돈 모아 호떡 사왔었는데......”라고 물으니
“호떡을 먹은 것 같긴 한데 기억이 잘 안나. 미안하구나. 그렇게 일에 미쳐 있지 않았다면 난 죽었을 거야. 딴 데 시집가라고 어지간히 괴롭혀야지. 참고 살았지.”
나는 그녀를 안쓰러워하면서 어느 틈엔가 내 몸에도 기쁨을 잃은 인간의 향기가 배기 시작했다. 오직 인내력만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한 여인을 닮아가고 있었다.
누구에게 마음을 열고 사는 가는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된다.
특히 가족이라는 깊은 인연의 고리들은 가치와 도덕을 공유하며 무의식적으로 개성을 만들어 가게 하였다. 이 모두의 성품들은 퍼즐 조각을 맞추듯 ‘나’라는 에고를 형성해 갔으니 양모 의 권위의식과 급한 성격, 아버지의 따스함과 예술적 감수성, 생모의 인내심과 불행한 마음 가짐이 어우러져 ‘나’라는 한 인간의 개성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내가 선택한 것들을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인가? 라고 물어 볼 틈도 없이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그렇게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한 예로 초등학교 시절, 내가 반장이 되었을 때 조금은 내 멋대로 폭군이 되어 있었다. 가장 강열하게 미워하는 사람을 닮는 것은 그만큼 당기는 요소를 나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니 양모의 급한 성질과 권위적인 모습이 내 모습의 한 조각이었다.
6학년 새 학기가 되자 양모가 사 온 새 가방은 나를 다시 조용한 아이로 만들었다.
그 가방은 중학교 오빠들이 그 당시 누구나 들고 다니던 회색빛 남자 가방이었다. 맘을 조여야 하는 일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강박관념과 열등감 그리고 우월감, 완벽주의의 성향이 눈 속에 새싹처럼 자라고 있었다. 무의식적인 삶은 자신을 필요한 경험과 빛나는 가치에 비추어 볼 거울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음의 세계에 가두어진 채로 ‘이것이 정녕 내가 원하는 인간의 삶이란 말인가’라고 생각할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헤르만 헤세와 톨스토이 니체의 글을 보면서 내려다보이는 신작로 의 길 따라 지나가는 행인들의 길게 남은 그림자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소녀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쓸쓸한 황혼이 오면 어딘가 나의 집이 꼭 있을 것 같은 향수에 젖곤 하였다.
3. **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돼? **
일곱 살 무렵 눈이 펄펄 내리던 겨울밤이었다.
느닷없이 어디선가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사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라는 소리가 들렸다. 내 몸은 이불속으로 들어가 무덤을 만들고 있었다. ‘무덤은 이같이 어둡고 답답한가? 죽음은 무엇일까?’ 누구에게 묻지도 답을 찾지도 못하는 의문으로 몸서리를 친 쓸쓸한 밤이었다. 바로 또렷한 한 생각, 어느 날 어디선가 불쑥 찾아 온 이 ‘한 생각’은 평생 나의 화두가 되어 바람결에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하며 알 수 없는 허기와 갈증을 반복하게 하였다.
헌데, 30년 후 어느 날 나의 딸이 “엄마!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엄마도 죽는 거고……. 나도 죽지? 흑흑.” 다시 32년 후의 어느 날 나의 아들이 “사는 게 뭔지 모르겠어. 죽는 것은 두려워. 사는 것도 별 의미가 없어 보여” 라며 내 품에 쓰러진다.
‘이런 젠장.’ 가슴에 칼날 같은 찬 바람이 지나갔다.
‘아 나도 이때쯤 이것을 나의 엄마에게 묻고 싶었고 답을 얻으려고 나도 먼길을 헤매건만….’ 지금은 대답해 줄 말이 없는데 책에 나온 말들만이 머리 속에서 왱왱거렸다.
“음, 엄마도 지금 그 해답을 찾아가고 있단다. 의문이 있으면 반드시 답이 있을 테니, 너도 답을 찾길 바래.”
우린 모두 똑 같은 의문을 가진 존재이며 누구나 생로병사를 그대로 겪어야만 한다는 명백한 현실을 아이들을 통해 인정해야 하다니 그 사실 만으로 텅 비어 폐허가 된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보는 것이 내가 겪는 고통 보다 수천 배 크게 느껴지며 수천 배 나를 무기력하게 하는지…….
“재민아, 신부님은 혹시 그 답을 알고 있을지 모르니 전화 걸어 줄까?”
흑흑 울면서 재민 이는 전화통을 부여 잡고 물었다.
“신부님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돼요?”
“야, 인마 그건 네가 찾아야지. 나도 몰라.”
중학교 시절 ‘신의 존재’에 해답을 얻고자 진실해 보이고 신념이 있어 보이는 ‘여호와의 증인’교도를 쫒아갔었다. 성경을 열심히 공부 하였지만 그 답을 알기도 전에 양모의 거센 반대로 포기하였고 고교시절에는 그 당시 대전에서 최고 학교에 진학하였지만 무의미한 공부를 그만두고 싶었다.
그러다 돌파구로 ‘불교 학생회’에 가입하여 내 나름의 해답을 찾고자 사찰과 책을 뒤지며 참선을 배웠다.
심장이 나빠지고 삶에 대한 고민은 끝없이 나를 고립시켜 자괴감에 빠지게 하였다.
나의 유일한 기쁨은 절에 앉아 수행을 배우는 것이었고 몇몇 선배와 강과 산을 찾아다니며 가슴의 답답함을 노래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나름대로 자기를 이해하고 살고 있다,
자신을 깊이 이해할수록 스스로 편하고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난 철저히 혼자만의 심리적 감옥 안에서 으르렁거리며 울지도 못 하고 있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생모도 삶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져 디스크 수술을 두 번 받았지만 몸이 틀어지고 제대로 걷지 못하는 지경에 빠져있었다.
그녀는 당분간 언니네 집에서 몸을 돌보아야만 했다. 집착적일 만큼 헌신해 온 그녀는 그렇게 우리와 떨어져 살게 되었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힘들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나는 오빠처럼 서울로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양모의 반대를 곱씹으며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충남대학에 진학하였다.
나의 아빠는 정년퇴직을 하고 집에 늘 있었는데 합격 소식을 듣자 눈물을 훔치시며 기뻐해주셨다. 왠지 그것만으로도 몹시 잘 한 일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나의 대학시절이 질풍노도처럼 거센 파도를 타고 건너야 할 항해의 시기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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