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본래모습
본래면목이라 한다.
이것이 참나다.
되찾는 길은
버리는 길을 걷는 것이다.
다들 싫어 한다.
그러니
길이 열릴 리 없다.
그렇다.
종교도 구하지 마라.
또한
이 종교 저 종교 종교 사이를 왔다갔다도 하지 마라.
아예
종교 자체도 버려라.
그래야
나의 본래 모습을 되찾는다.
종교는 수단이다.
참나만이 목적이다.
참나를 만나는
또 한가지 다른 길이 있다.
하고 싶은 것을 실컷 하라.
그러면 저절로
참나만 남고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간다.
과일도 익으면
저절로 떨어지듯이.
이것만이 진정으로 버린 것이다.
놀이로 가지고 노는 것도 버린 것이다.
나가 주인이 될 때
무엇이든 버릴 수 있게 된다.
술을 실컷 먹고 노름이나 마약에 빠지는
것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는 그들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웃음이나 기쁨이 수반되어야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다.
실패와 성공
이들 모두
존재계가
베푸는
에고를 내려놓는 기회이다.
언제 에고가 자라고
언제 에고가 사라지는가.
동일시이다.
동일시를 통해서 에고가 자라나고
내려놓음을 통해서
에고가 사라진다.
집착도 동일시이다.
좋은 것을 찾고 나쁜 것은 멀리 하는 것도
집착이다.
왜 집착하는가.
무지하기 때문이고
또한
집착에서 벗어나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주어진다는 사실은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사람들은 또한
행복 아니면 불행
둘중 하나를 붙잡고 산다.
이야말로 무지의 소산이다.
그러나
동일시는
에고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다.
동일시를 통해서 자기를 정립하는 것이다.
삶은 집착하라고 주어진 선물이 아니다.
놀이로 주어진 것이다.
삶은 이미 완벽하다.
이미 다 주어져 있다.
그러니
살면서는
아무 것도 붙잡지 말고 단지 놀이로 즐겨라.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도 아니고
실패한 사람들도 아니다.
단지 모든 동일시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다.
삶이란 무엇인지 안 사람들이다.
더나아가
나는 누구인지 안 사람들이다.
도마복음 67장에서는
모든 것을 알되 자기자신을 아는데
실패한 사람은 완전히 결핍된 사람이다라고 하고 있다.
천국이 무슨 소용인가.
욕심쟁이들이 모인다면.
또한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다면.
예수의 가르침도 모두 다
나는 누구인가를 아는데 집중하고 있다.
특히 도마복음이 그렇다.
나를 아는 자는
모두 삶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이자
이미 에고가 죽은 거듭난 자이다 .
그래서
도마복음 111장에서는
자기자신을 발견한 사람은 이 세상이 가치가 없다고도 했다.
그러니
노는 일밖에 없다.
놀이의 대표적 인물로는
크리슈나와 구제프와 장자가 있다.
물론 예수도 놀이하는 인간에 속한다.
도마복음 37장의
제자는 옷을 벗어야 한다에서
옷도 에고를 뜻한다.
예수의
짐을 내려놓는다는 말도
에고를 버리는 것을 뜻한다.
짐진 자란 의미도
에고란 짐을 말한다.
깨달은 후에는 에고도 참나가 된다.
그리고
에고가 죽어 거듭나면
삶 자체가 놀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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