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여성과 남성의 차이
남자는 에고를, 여자는 사랑은 지향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같다.
이렇게 목적이 다르니 남녀사이는 친구가 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점점 어려운가 보다.
여자가 사랑 지향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이를 기르기 때문이다. 사랑만이 누군가를 기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남자가 아이를 키우는 가정에서는 아빠가 사랑 지향적이 되어야 하리라.
그런데 문제는 여자라고 해서 다 사랑을 알고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단지 필요에 의해서 사랑을 목적으로 하는 삶을 살아갈 뿐이다.
남성도 사랑을 목적으로 할 때가 있기는 있다. 그가 스승이 되었을 때이다. 제자를 기르려면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때 남자도 비로소 여자가 된다. 그런데 여자는 이미 아이를 키운 경험이 있어서 인지 좀처럼 스승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여기서 스승이란 진리나 지혜를 전해주는 사람을 말한다. 선생이나 교사는 스승과는 달리 지식의 전달자 역할을 하는 직업인으로 누구나 지식만 있으면 가능하다.
에고의 특성 중 하나가 닫힘이다. 그래서 남성끼리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래서 술이 필요하다. 술의 힘을 빌려야 비로소 마음을 여는 것이다. 또 얼마나 닫혀 있어 답답하기에 매일 술을 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남자들이 존재하는 것인가. 여자끼리는 술 없이도 곧잘 수다를 잘도 떤다.
나는 나의 언행이나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에고의 활동이라고 보지 않고 의식의 활동으로 보고 있다.
이것이 깊이 본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것이 에고가 바라는 것과는 상관없이, 지금여기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모두 나에게 최선일 뿐 아니라 지극히 아름다운 진리의 삶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이 존재계에 대한 전적인 신뢰인 것이다. 또한 지복의 삶인 것이다.
물론 남의 언행도 다 신의 표현인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겉으로 보면 인격의 활동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다. 에고는 활동의 주체는 아닌 것이다.
인격이라는 에고를 주체로 보고 있는 한 모두 고통과 절망 속에서 헤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나도 신, 너도 신, 여기도 신, 저기도 신이라는 결론에 도달해야만 자유와 사랑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세상은 겉으로는 에고의 활동무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신의 활동 무대인 것이다.
우리의 생활이란 에고가 주인인 것으로 착각할 수는 있어도 결국 신이 이끌고 있는 것이기에 꼼꼼히 살펴보면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은 신이 벌리는 잔치마당인 것이다.
2. 사랑의 사람
중심에 이른 사람은 사랑이 모두를 채워준다는 것을 안다. 사랑만이 모든 욕망과 행위도 잠재운다는 사실도 안다.
사랑이 돈이 주는 모든 것을, 명예나 권력이 주는 것을, 또한 우리가 구하는 모두를 채워주는데 무엇을 더 구하고 행한단 말인가.
사랑만이 진정한 앎이다. 에고는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삶의 주인이고 잘난지 안다. 아무리 해도 에고의 실력으로는 진리를 알거나 행복을 찾지는 못한다. 다만 절망과 파멸로 이끌 뿐이다. 에고의 생각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삶을 계획하고 성취하려 하고 자신의 생각을 고집한다. 에고는 행위와 욕망의 싹일 뿐이다.
몸이 있는지 없는지 안 느껴질 때가 건강한 때이듯이 에고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때가 행복한 때이다. 이래서 이들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을 때 그는 진정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존재에 이른 자이기도 하다. 이는 몸도 에고도 존재하지 않고 의식인 사랑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때까지는 몸과 에고가 스스로를 섬기면서 산다.
허전하고 뭔가 부족을 느낀다면 아직 도달한 것이 아니다. 충만감이란 사랑만이 줄 수 있는 것이다
3. 마음과 에고의 양식
에고는 존중과 대접을 받고 자란다.
그래서 대접을 받지 못하거나 인정받지 못하면 섭섭해한다.
물론 인정을 받지 못하면 에고는 자라나지 못한다. 바보와 푼수들이 바로 그들이다. 결국 인정받지 못하고 대접받지 못할 때 섭섭해한다는 것은 에고가 주인이 되어 있다는 의미도 된다.
또한 순진무구하다는 것은 아직 에고가 자라나지 않은 상태를 일컫는다. 이때는 아직 의식이 주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에고가 자라서 주인 노릇하다 실패하여 나가떨어지고 본래의 주인인 의식이 나서는 것이 소위 깨달음이다.
이는 거듭난 삶이기도 하다.
이때부터는 남의 인정을 받거나 칭찬을 받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의식은 신이기에 자신의 가치가 무한함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우월감이나 열등감도 동시에 사라진다. 몸과 에고도 이제부턴 자신을 섬기기를 그치고 의식을 섬기기 시작한다. 따라서 세상의 어느 것도 그를 사로잡지 못한다.
본래 인간의 몸이나 에고는 주인인 의식이 세상에서 놀거나 자기 뜻을 펴기 위해서 만들거나 채용한 수단이요 하인이었던 것이다.
모든 무생물 또는 생물도 이와 마찬가지다. 성경에서의 선악과가 바로 에고의 양식을 뜻하는 것이고 이원론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예수는 에고가 주인인 인간상태를,그리스도란 의식이 다시 주인이 된 신인 상태를 의미한다.
이후로는 에고의 양식인 선악과는 더 이상 먹지 않으며 따라서 선악의 구분도 사라진다.
잘나고 못나고도 따지지 않으며 행불행에도 관심이 없어진다.
이것이 무선택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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