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
앞마당에 모래를 쌓아 놓았다. 동네 꼬마들이 모래를 가지고 논다.
놀이란 지금여기를 즐기는 것이다.
그래서 목표가 없다.
그러나 에고는 목표를 좋아한다.
목표달성만이 즐거움이기에 목표를 이루는 순간부터 상대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다.
그래서 목표는 천천히 이루는 것이 에고를 다루는 요령이다.
완성할 때까지는 관심과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놀이의 또 다른 특징은 지금 여기에 주어져 있는 것을 가지고 논다는 점이다.
없는 것은 찾지 않는다.
어린이가 놀이를 좋아한다는 것은 이미 그가 지금여기에서 살다가 온 존재라는 의미이다.
순진무구함도 그렇다.
이런 놀이도 지금 어린이에게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중의 하나이다. 논다고 하면 무조건 말린다.
그러나 인간은 하지 말라는 것이 많을수록 그만큼 성장하지 못한다.
여자가 더욱 닫힌 이유중의 하나가 여자로 태어나면 그 순간부터 하지 말라는 것이 남성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남녀 평등도 대우를 같이 한다고 해결되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에 남녀의 차이가 없어지지 않는 한 남녀사이의 불평등은 존재할 것이다.
하지 말라와 안된다는 분위기에서 자라다보면 열등감이라든지 창피감이 생긴다.이것이 자기 사랑에서 멀어지게 하는 주범이다.
하라라든지 해야만 한다도 마찬가지다.
이들도 행복과 사랑을 파괴하고 부자연스러움과 거짓에 물들게 한다.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공부를 하라는 소리를 듣고 자라는가. 공부가 적성이 맞는 사람은 몇이 안된다.
또한 밥먹으라고 윽박질렀다.
그러면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한다.
이런 환경속에서는 의식이 성장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해할 수 있는 능력도 커지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가 상대보다 성장하지 못하고 닫혀 있다는 증거이다.
인간은 자기가 성장한 만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하라라든지 하지 말라는 것이 하나도 없어진다면 그가 진정 자기에 도달한 자이다.
또한 이런 분위기에서 자랄 수 있다면 그는 진정 복된 자이다.
우리가 장에 가면 장사하는 사람에는 관심이 없고 무엇을 사느냐 또는 얼마나 싸게 사느냐에 주의를 집중한다.
마트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인지 종업원들도 우두커니 또는 멍청이 서 있거나 하다가 손님을 대한다.
완전히 기계 같다. 자신이 기계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내가 먼저 말을 붙이니 무척이나 좋아한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스스로 기계가 되려니까 할 수 없이 신도 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신이 또는 전체가 이 일을 원해서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즐겁고 또한 기쁘게 일할 수는 없는 것인가.
이때 일은 저주나 재미없는 것이 하니라 하나의 축복이요 놀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물질생활과 명상생활
물질문명의 발달은 우리의 생활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물질은 몸의 영역이기에 몸이 몹시 편해지고 살이 오르게 되었다. 이렇게 겉에다만 신경을 쓰는 사이에 인간관계와 신이나 자연과의 관계는 끊어진 지 오래다.
그리하여 인간이 서로 만나는 것도 꺼리게 되었고 서로 오가며 나누는 정도 사라진지 오래다. 그보다도 자연이나 신과의 관계가 끊어짐에 따라 사는 즐거움도 동시에 사라진 것이 더 큰 변화다. 따라서 자연과 신이 얼마나 많은 혜택과 경이와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는지를 잊은 지도 오래다.
물질에 매달리면서 돈과 일만을 중시하게 되어 모두 일의 노예가 되었다. 인간과의 관계가 끊어지자 인정도 같이 사라졌다. 그래서 지금 시골 인심도 예전 같지는 않다. 더 나아가 신과의 관계가 사라지자 웃고 노는 시간도 같이 사라진 것이다. 즉 기쁨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종교에 빠져 있는 동안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사이비 종교라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사실 북한체제도 사실은 종교집단과 같다. 그들이 남한사람보다 더 행복해 하는 것을 보라.
인간은 중심부와 연결되어 있는 정도에 따라서 행복감을 맛보고 있는 것이니 이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인 것이다.
이제부터는 명상을 통해서 자신의 심층부로 향할 때인 것이다.
물질문명을 누리는 것은 남의 도움으로도 가능하나 명상은 자신이 직접 뛰어 들어야만 가능하다는 점이 다르다.
주는 것과 받는 것
받는 것에. 머뭇거리거나 창피해 하는 사람이 있다. 절대 그럴 필요가 없다.
이와는 반대로 주는 것을 머뭇거리는 사람이 있다.
이는 우리의 삶이 주는 것인 동시에 받는 것임을 모르는 데서 기인한다.
그러니 누가 주거든 얼른 받아라. 또 주고 싶거든 얼른 주어라. 이것이 서로를 돕는 길이다. 그러므로 누가 무엇을 주겠다고 하면 즉시 가서 받아와야 한다. 하루 사이에 맘이 변할 수도 있으니까. 또 놀러오라고 할 때도 3일 내에 찾지 않으면 무효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떠나 주기를 바라는데 머뭇거리는 것은 서로에 부담이 된다.
짐이다.
이때도 즉시 떠나라.
쫓아내려는 낌새를 느끼면 즉시 행동에 옮겨라. 동시에 이루어져야 쌍방에 상처가 되지 않는다. 이 타이밍을 잘 맞추는 것이 진정 지금 여기를 사는 태도이다.
이것이 사는 맛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나에게 스트레스를 발산하면 즉시 되돌려 주는 것도 잘 받아주는 태도이다.
받아서 간직할 것은 없으니 무엇이든 되돌려 주라.
내가 싫어하면 상대는 또 다시 주지는 않을 것이다.
즉 내가 상대를 싫어하거나 반기지 않으면 상대는 다시 나를 방문하지 않는 법이다.
사랑과 기쁨은 즉시 무조건 주어라.
그러면 사랑과 기쁨은 몇배 아니 몇백배가 되어 되돌아온다.
그러나 되돌려 받기 위해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또한 주어지는 사랑과 기쁨은 무조건 즉시 받아라. 이때 더 많은 사랑과 기쁨이 주어질 것이다.
가려운 곳은 지금 여기서 즉시 긁어야 시원한 법이다.
문제가 있다면 지금 여기서 해결하고 넘어가라. 지금 여기서 해결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불가능하다.
이는 지금여기만이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너무나 많이 과거나 미래에서 해결책을 찾아왔다. 이는 해결책도 아니고 현재만을 놓치고 살게 한 원인인 것이다. 싫다는 것은 지금여기서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니 하지 말아야 한다. 싫어하면서 하면 지금여기를 놓친다. 좋아할 때 즉시 하면 지금여기를 사는 것이다.
생각이 났을 때도 즉시 행동에 옮겨라. 왜 미루는 것인가. 생각도 낭비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따져보는 것은 머리에 짐을 지우는 일이다. 또한 아무리 잘해보아야 서로의 에고만 키운다.
머리는 존재로 이끌지 못하니 안심하고 가슴에 맡겨라.
가슴은 모두를 따뜻이 감싸 안는다. 그래서 가슴만이 사랑으로 인도한다.
가슴은 잘 주기도 하지만 잘 받기도 한다. 사랑은 잘 받고 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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